[얼불춤] 충격!) XT-X 절대 과부하가 걸리지 않는 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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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우스의 배

1. 개요[편집]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 귀환한 테세우스의 배를 아테네인들은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썩으면 그 낡은 판자를 떼어버리고 더 튼튼한 새 판자를 그 자리에 박아 넣었던 것이다.

커다란 배에서 겨우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수리한 배에서 다시 다른 판자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시점부터는 테세우스가 있었던 원래의 배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 플루타르크

Ship of Theseus

사물의 변화와 그 정체성의 지속에 관한 형이상학의 난제 가운데 하나로, 본질주의나 다발론과 관계가 있으며 더미의 역설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실제 일화를 배경으로 이해하기 쉬운 현실적인 예를 들고 있으며, 더욱이 여러 형태로 변주될 수 있기에 인기가 많다. 아래에 나오듯 각종 영역에 다양한 함축을 가지며, 각종 예술, 서브컬처 작품에 모티브를 주었다.
2. 심화[편집]
토머스 홉스는 테세우스의 배 난제를 다음과 같이 다시 한번 꼬았다고 알려져있다.
위와 같이 테세우스의 배에서 판자를 하나씩 갈아끼우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배를 배1라고 하자. 그런데 테세우스의 배에서 갈아끼운 낡은 판자들을 버리지 않고 그걸로 다시 테세우스의 배와 똑같이 생긴 배를 만들어 배2라고 부르자. 배1과 배2, 배 두 척이 생긴 셈이다. 그렇다면 둘 중에 테세우스의 배는 무엇인가?
2.1. 답변들[편집]
단순히 조합만을 따지자면 가능한 답은 네 가지지만, 각 답 모두 일견 설득력 있는 반론에 부딪히는 것처럼 보인다.
배1이 테세우스의 배다:
예시. 테세우스가 살아있는 상황에서 그가 스스로 배의 널판지를 하나씩 교체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부품을 얼마만큼 바꾸더라도 테세우스가 그 배를 소유하고 있는한 그 배는 테세우스의 배로 남으며, 반대로 테세우스가 버린 부품으로 누가 테세우스의 배와 같은 모양의 배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건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게 된다. 이제 테세우스가 죽음이나 양도로 소유권을 아테네시에 넘겼다고 가정해보자. 이제 아테네시에 넘어간 테세우스의 (배였던) 배는 테세우스가 한때 소유했었기에 테세우스의 배로 여전히 불리겠지만 소유권은 아테네시에 있을 터이고, 부품이 교체되어도 테세우스의 배는 테세우스의 배로 남는다.
반론: 이건 테세우스의 배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얘기가 다르다. 만약 테세우스가 소유하고 있는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경우, 테세우스는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수리한 배1을 테세우스의 배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실제로 사용한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정의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테세우스가 수리한 배1은 분명 자기 소유지만, 자신이 미노타우로스를 잡을 때 실제로 사용한 배는 아니기 때문.[1]
배2가 테세우스의 배다:
예시. 테세우스의 소유권이 사라진 후에 배에 인위적으로 널판지 하나를 가하거나 감한 순간부터 오리지널리티[2]가 손상받게 되고, 그것은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르스를 죽이고 돌아올 때 탔던 그 배라는 유물로의 가치를 잃게 되며, 원래 있던 널판지와 같은 형태와 재질의 널판지로 갈아끼운다 할지라도 그건 복원품에 지나지 않게 된다.[3]
반론: 테세우스의 배의 판자를 하나씩 떼어 배2를 건조하는 과정에서 배2는 어느 순간에 테세우스의 배가 되는가? 배 판자 하나만을 뗀 상태에서 그 판자 하나짜리 배2가 테세우스의 배인가? 아니면 배1은 원래 테세우스 배의 최후의 판자를 떼기 직전까지는 테세우스의 배였다가 마지막 판자를 떼는 순간 다른 배가 되는 것인가? 두 대답 모두 지나치게 극단적인 것으로 보이며, 만약 그 '중간'이라면 기준을 알기 어렵다.
배1과 배2 모두 테세우스의 배다:
반론: 테세우스의 배는 하나였는데, 배1과 배2는 둘이다. 1≠2이므로 테세우스의 배는 배1과 배2 모두가 될 수는 없다.
배1과 배2 모두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다:
반론: 다음 두 시나리오를 고려하라:
(i) 테세우스의 배를 그냥 분해했다 다시 조립해서 배2만이 있다.
(ii) 테세우스의 배에서 뗀 판자들을 그냥 불태워서 배1만이 있다.
(i)와 (ii) 양 시나리오 각각에서 배2와 배1은 테세우스의 배였다고 볼 개연성이 높다. 그런데 (i)와 (ii)에 있는 것들은 모두 현 시나리오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어째서 현 시나리오에선 (i)와 (ii)와 달리 되려 '테세우스의 배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외에도 다음과 같은 대안적인 대답도 가능하다.
테세우스의 배라는 것 자체는 우리가 부여한 의미일 뿐이다. 따라서 현실이 이러한 부여된 의미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시. 누군가 테세우스의 배라고 인식하면 그 사람에겐 그것이 곧 테세우스의 배다. 판자를 교체한 사실을 모르고 전시된 배를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그것이 곧 테세우스의 배이며, 반대로 판자가 교체되어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에겐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다. 즉, 생각하기 나름이며, 애초에 정답이 없는 이야기다.
예시. 테세우스가 배에서 내린 순간 이미 테세우스의 배는 사라졌다. 이 논의에서는 사람의 손에 의해 판자가 교체되는 경우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미시적인 시각에서 보면 마모되거나 산화되거나 혹은 미생물이 증식하거나 먼지가 쌓이는 등 굳이 사람의 손으로 판자를 교체하지 않더라도 비슷한 종류의 일들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엄밀하게 보면 테세우스가 타고 있던 배와 내린 후의 배는, 설사 인위적으로 판자를 교체하지 않더라도 물리적으로는 완전히 똑같은 존재가 아니다. 다만 인간의 직관에 같은 존재로 여겨질 뿐이다.
예시. 무지개에서 빨강색과 주황색의 경계가 모호한 것처럼, 얼핏 명확히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는 개념들을 원론적으로 엄밀하게 정의하고 구분하려 들면 그 경계가 모호하고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판자가 한두개 바뀌었을 때는 여전히 그때 그 테세우스의 배이며 대부분의 판자가 바뀌었을 때는 원본이 아니지만, 양쪽의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고 불분명한 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해석: 의미와 개념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해버리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되지만, 필연적으로 더 복잡한 질문들을 낳게 된다. 예를 들어 '그렇다면 우리가 테세우스의 배라 인식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준을 제시함으로서 정의를 명확히 할 수는 없을까?' 등등.[4][5][6] 이 역설이 한두마디 정답을 구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이렇게 다양한 철학적 문제들을 생각해보라는 의도로 나온 것이라 생각해야 맞을 것이다.
3. 이 역설이 함축하는 의미[편집]
일반적으로 테세우스의 배는 다음과 같은 보다 일반적인 철학적 문제들이 얽혀 생겨난 역설이라고 해석된다.
질적으로 다른 대상들이 수적으로 동일할 수 있는가?:
이는 동일성에 관한 설득력 있는 원리 중 하나인 '동일자의 구별불가능성 원리'[7]에 어긋나지 않는가?
이는 가능세계 관련 논의에서도 '통세계적 동일성(transworld identity)' 문제라는 형태로 재현된다.
물리적 사물의 정체성은 오직 그 물리적 부분에 의해 결정되는가?:
즉 사물의 물리적 부분은 그 사물의 본질적 요소인가? 즉 부분이 바뀌면 그 사물은 필연적으로 다른 것이 되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물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형이상학에서의 물질적 구성(material constitution) 문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사물이 변화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파르메니데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질문. '어떤 사물 a가 b로 변한다'는 것은 곧 'b는 더이상 a가 아니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떤 사물이 변화하지만, 여전히 그건 그 사물이다'라는 것은 어떻게 말이 되는가?
형이상학에서의 Endurantism vs. Perdurantism 논쟁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Perdurantism 혹은 4차원주의에 따르면 물리적 사물은 시간적 부분(temporal part)들, 혹은 3차원 시간 단면들[8]의 합이다. 즉 '사물 a가 b로 변했다'는 말의 의미는 곧 a와 b가 시간축에서 연장된 대상 a+b+...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이 된다. 내 눈과 내 손가락이 내 몸의 일부분일 뿐인 것처럼 말이다. 데이빗 루이스가 이런 4차원주의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모호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더미의 역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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